윤태옥 _ 여행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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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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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에, 내가 일하던 방송위원회에서 새로운 월간지 〈방송〉을 창간했다. 편집부가 새로 구성되면서 나는 같은 또래의 김우영을 만났다. 김우영은 대학원을 마치고 사진기자로 입사한 것이다.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에서부터 말과 행동에서 기존의 조직 구성원에서는 볼 수 없는 자유분방함이 흥건했다. 업무적으로도 나와는 연결점이 있었고 사진이란 나의 소박한 취미로 인해 나는 기꺼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열성적으로 일을 했으니 당연히 보람도 있었고, 그는 자유분방했으니 관료적인 조직에서 상하좌우로 거슬리는 일도 있었다.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스크래치가 나면 나는 대로 소주 한잔을 함께 기울이곤 했다. 웃음바다를 일구거나 성토장을 펼치기도 했고, 술만을 위한 술판을 벌이기도 했다. 나는 사생활을 살짝 침해하는 느낌에도 불구하고 김우영의 작업 공간인 편집부의 암실도 가끔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그의 이십대 후반을 한 직장에서 목도했다. 그의 졸업 작품집을 내가 소장하게 된 것도 그때였다.
1990년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사표를 냈다. 그의 사표는 예상된 것이었다. 월급쟁이 사진기자, 그것도 국가기관 소속이란 것은 젊은 시절의 단기 체험으로는 모르지만 그의 인생을 담을 수 있는 포맷이 아니었다. 그의 작품에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공간이 될 리도 없었다. 그는 월급쟁이 사진기자라는 임시 레이블을 털어내고는 서른의 청년으로 돌아갔고, 곧 뉴욕으로 떠났다.
1993년
몇 년이 지났을까. 그에게 들은 뉴욕 생활은 유학에 단련을 버무린 것이었다. 누가 봐도 쉬울 리가 없었다. 사진기 한 대에 감각이란 필터 하나만 끼우고는, 낯선 이국의 외국어 속에서 새로운 사진 세계에 부딪히며 생존과 공부와 작품을 한꺼번에 헤집었던 것이다. 그동안의 몸과 맘이 어땠을지는, 그것을 통해 얼마나 다른 좌표로 옮아갔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1995년
한동안 서울과 뉴욕을 오가다 귀국을 했다. 상업사진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주로 강남 신사동 스튜디오에서 만났던 것이 기억되는 시대였다.
많은 패션모델과 연예인이 그의 카메라 앞에서 춤을 추었다. 내가 굳이 묻지 않아도 상업적으로 성공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개인 전시회도 멈추지 않았다. 상업사진도 작품이라고 하지만 그건 업무이기도 하다. 그 많은 업무 속에 자기 사진 세계는 따로 품고 살았다.
내 눈에 김우영은 에너지가 넘쳤다. 그의 전시 작품에는 도시공학이라는 이십대 초반의 공부가 항상 깔려 있었다.
2003년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그의 작품은 도시공학적이고 추상적인 이미지가 아닌, 사람의 사진이었다. 전국의 암치료 병원을 다니면서 암을 안고 사는 또는 암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그들을 직업적으로 돌보는 의료진과 보호자들을 담은 작품이었다. 환한 톤의 치료 공간 안에서 미소 짓는 암 환자,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의 부드러운 미소. 암담하고 버거운 현실을 밝은 생명의 움직임으로 담아냈다. 내가 처음으로 김우영의 작품에 대해 본인에게 직접 코멘트를 했다. 사진이 참 좋다고, 내 가슴팍의 살갗으로 스며들어 온다고.
2007년
누구든 어떤 인생이든 굴곡은 있다. 그는 잘나가던 상업사진과 또 다른 사업적 활동을 일체 멈추하고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이제는 작가로서 남길 수 있는, 일생의 파인아트 작업에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돈줄을 놓고 가다니, 그것도 중년의 나이에. 나 같은 소심한 생활인에게는 위태로운 선택을 한 것이다. 그전에도 그의 재무를 알지 못했고 이후로도 마찬가지였지만 내 소심한 걱정 한 자락이 그를 따라갔다. 뉴욕으로 갈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2011년
그때 나는 한국 사회에서 발을 빼고 중국에서 일 년의 반 정도를 여행하는 ‘조금 이상한 여행객’이 되어 있었다. 김우영이 중국의 윈난(雲南)으로 날아왔다. 등에는 여행배낭을 메고, 앞으로는 카메라 가방을 두르고는 쿤밍공항의 입국장을 빠져나왔다. 손에는 큼직한 핫셀블라드가 들려 있었다. 파인아트에 집중하고 있는 사진작가의 품세가 생생했다. 전시장이 아닌 현장에서 작가를 만나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지만 그 이전에 그냥 보기 좋았다.
다른 동반자 없이, 스무 해가 넘은 친구와 스무 살 넘은 작은아들과 셋이서 윈난 여행을 했다. 나는 여행을 했고, 그는 작업을 했고, 작은아들은
추억을 쌓았다. 산에서 내려온 물이 시골 마을을 가로지르는 수로에서 한없이 셔터를 눌러대는 그를 기억한다. 낡은 담벼락을 카메라로 뚫어버릴 것같이 셔터를 눌러대던 것도 생생하다. 유채의 노란 꽃이 덮어버린 들판도, 대협곡에서 눈높이로 떠가던 구름도. 거친 고갯마루에서 숨을 몰아쉬던 내게서 카메라를 가져가더니 후루룩 셔터를 몇 번 눌렀다. 그 순간을 잡아준 것이다. 그 사진은 지금도 내 프로필로 사용하곤 한다. 그 이후 김우영이 윈난을 다시 찾았다는 소식도 들었다.
2015년
어떤 계기가 있어서 그의 눈은 디아스포라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인문기행 중국’이란 타이틀로 일 년의 반을 중국 어딘가를 돌아다녔다. 그는 나의 답사여행 이야기에서 디아스포라 몇 조각을 잡아챘다. 곧바로 배낭을 꾸리고 그와 함께 북방의 삼림 깊은 곳으로 갔다. 비행기로 도착한 하얼빈에서 그곳까지 가는 길은 말 그대로 대지(大地)였다. 고속도로를 두 시간이나 달려도 산은커녕 언덕배기도 하나 없었다. 그게 전부 옥수수 밭이라는 놀라움과 함께 현실의 대평원이 뿌려대는 환각으로 그 시간과 공간을 다 채운 길이었다. 버려진 땅처럼 보이는 초지는 또 얼마나 달렸는지. 그다음에 통과하는 구불구불한 산길은 아기자기한 이야기였다.
산길을 달려 산맥을 서쪽으로 건너서 다다른 후룬베이얼 초원은 만주의 대평원과는 또 다른 대지였다. 눈을 찌푸리며 던지는 시선도 다다르지 못하는, 무망(無望)의 곡선이 그려주는 대지의 윤곽, 고요히 역사가 잉태되고 용광로로 끓어올랐던 대초원, 그곳에 가늘지만 끊어지지 않고 지평선으로 사라지는 길들.
인생에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것은 없다. 오래도록 쌓인 것이 고개를 내민 것일 뿐이다. 김우영이 오늘 〈THE VASTNESS II〉를 내는 것은 그동안 그의 몸과 맘에 쌓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평원과 산맥과 삼림과 초원의 몇몇 장대한 기억을 내가 공유하고 있다니.
그런 길을 지나면서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을 만났다. 퉁구스족 어원커족 다싱안링 순록과 같은 익숙하지만 실제로는 낯선 어휘들과 함께 여행을 했다. 삼림 속에 순록을 키우며 사는 어원커족의 텐트에서 눈을 뜬 것도 그때였다. 아침이면 집으로 돌아오는 순록, 그들의 목에 걸린 방울에서 튕겨 나온 낭낭한 소리가 안개 속을 넘나들던 아침이었다.
2016년
그다음 해에는 서울 성북동의 최순우 고택에서 전시회가 있었다. 한옥의 벽에 걸린 그의 작품 속에 한옥이 소담스레 들어앉아 있었다. 작품에 담긴 것은 한옥의 부분부분이었지만 작품마다 한옥 한 채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전에도 그랬고 이후로도 그의 시야는 항상 팽창하고 있었고, 그의 시선은 먼 곳과 가까운 곳 두 개의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2022년
그전에도 그 후에도 전시회가 매년 열렸음은 물론이다. 2022년도 그랬다.
연락을 주고받고 그를 만난 것은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는 임시 작업실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두 권의 작품집을 내게 선물했다. 〈Poetics of Tranquility〉와 〈Urban Odyssey(north america)〉 두 권이었다. 연한 회색과 연한 핑크색 커버가 인상적이었다. 책등이 3.5cm에 높이는 36cm, 무게만 해도 3kg 정도 되는 작품집! 그것도 두 권!
그리고 2023년
〈바다의 역사〉를 더듬어 유럽 어딘가를 여행하고 있을 때 김우영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이번에는 세 번째 작품집 〈THE VASTNESS〉를 낸다고. 작품집에 내 글 한 편을 싣고 싶다는 것이었다. 반가운 소식이었으나 망설였다. 워낙에 내가 미학에 둔한 데다가, 그의 일생을 종합하는 작품집에 부실한 글 한 편이 끼어서 어쩌나 싶었다. 거절하고 싶은 마음은 많았지만 그동안의 세월이 거절하지 못하게 했다. 그의 작품 일생을 종합하는 작품집에 부족하지만 내 작은 인연의 조각을 하나 넣기로 했다. 한 사람의 작품 일생을 계속 보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게다가 전시장에서 관객과 작가의 관계에 머물지 않고, 한때의 술잔과, 먼 곳에서 또는 먼 곳으로의 여행과, 심지어 아들을 대동한 조우까지 버무려 있으니.
그의 훌륭한 작품집에 얹는 작은 회상을 이제 마친다. 그가 자신의 작품과 함께 수록해주니 친구이자 관객으로서 고마울 따름이다.
끝으로 한 마디, 이 작품집이 그의 후반전의 마무리인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으려나? 그건 아니다. 김우영은 이제 전반전을 마치고 후반전으로 넘어가는 하프타임을 채우고 있을 뿐이다. 본인도 그렇게 생각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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