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건수, 사진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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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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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화지 한 장의 무게를 느낄 수 있는가?
인화된 이미지의 무거움을 느끼는 경우는 현실을 투사함으로 삶을 각성시키는 견고한 틀을 만들어 내는 때이다. 예술의 역사란 삶과 자연에 대한 예민한 촉수를 가진 사람들의 현실 투사의 역사라면 역설일까? 헤겔과 쇼펜 아우어가 말한 예술가란 현실의 외적 가면을 뚫고 들어가 통찰력과 상상력으로 그 내면을 밝혀내는 특출한 힘을 가진 이를 두고 한 말은 아닐까? 반대로 최악의 상황이지만 이들 예술가들이 이데올로기와 연합하여 위장된 미로 미의식 자체를 이념화하기도 하며, 또 한편으로는 프레드릭 제임스의 주장처럼 독점자본주의 문화 전력의 시녀로 전략하여 예술 스스로가 상품화되고 상품화된 예술은 단순한 예술의 소비자로 우리를 위치시킨다. 우리의 숙제는 이러한 시대의 상황을 어떻게 읽고, 자신의 예술 위치를 어디에 자리매김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문제에 대한 의무의 무거운 짐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사진가의 운명 또한 그가 이 시대의 예술가로 자임하는 한에서는 무거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이 동행의 길에 사진가가 소유한 무기란 무게를 못 느끼는 인화지 한 장이다.
그러나 그 인화지는 탄탈토스의 목마름처럼 진실에 굶주림을 느끼는 끝없는 갈증의 종이어야 한다. 목마름을 겪지 못한 사람이 목마름을 외칠 때 슬픔은 부피를 더해 간다. 그동안 우리가 인화지 위에 담아 왔던 삶에 대한 의식과 세계에 대한 인식 문제가 갈증을 느끼지 못한 자의 갈증에 대한 진술과 같기에 한없이 무거워야 할 인화지는 그 무게를 잃어버리고 한 장의 가벼운 종이라는 물성만 남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생각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다. 주시하다시피 이제까지의 한국 사진은 사실주의와 살롱이라는 두 개의 패러다임 속에서 안주하여 왔다. 또한 패러다임에서 당당히 길항하여 꽃을 피워내지 못하고, 오늘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새로운 사진 어법의 추구에도 쉽게 조응도 못하면서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문법. 같은 어법 이외에 무슨 대안이 있겠느냐며 대안 없는 사진을 찾아 이곳저곳을 헤매다니는 사진가를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긴 50년대 60년대의 슬픈 삶을 가슴에 담아 온 사람들이 만나는 영상은 또 그것에 감동하는 세대들이란 같은 흔적의 삶을 나눈 세대일 수밖에 없다. 검은 고무신 신고, 책보에 둘둘 말아 허리와 어깨에 메고 가던 학교길의 추억과 골목길을 돌며 밥 동냥을 하던 전쟁고아들의 슬픈 얼굴을 만나지 못한 오늘날의 젊은 사진가들에게 그것이 사진이고 사진은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하며 재개발을 기다리고 있는 달동네 사진이나 찍어와야 리얼하고 인화지에 삶의 무게가 듬뿍 담겨 있다고 믿는 사진가들에게 김우영의 사진은 기초도 모르는 엉터리인가? 오늘날의 사진가는 뒤를 보지 않는다. 앞을 보아도 볼 것이 너무 많다. 그들은 그들의 감성으로 세계를 본다. 리오따르는 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현대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한다.
“우리는 레게 음악을 즐기고 서구적인 것을 감상하며 점심에는 맥도널드 음식과 저녁으로는 쿠르아상을 먹으며, 동경에서는 파리제 향수를 뿌리고, 홍콩에서는 복고풍의 의상을 즐겨 입는다. 지식은 TV 게임을 위한 재료로 둔갑하기도 한다. 키치가 됨으로써 애호가들이 선호하는 취미에 맞추어 가기를 희망한다.” 오늘날의 젊은 사진가들은 영상 시대 특히, 칼라 TV 시대에 시각적 감성을 다듬고, 팝 뮤직에 몸을 흔들며 성장해 온 세대들이다. 보아야 하는 것은 이들을 통해서 주름진 과거 모습의 들춤이 아니라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에 대한 투사물을 이들의 감성의 통로를 따라가면서 보는 것이다. 그의 인화지도 무게를 느낄 수 없을 만큼 얇다. 인화지에 담아내는 것도 우리가 흔히 감탄하는 빛의 조화의 순간이거나 누구도 찾지 못하는 비밀의 장소, 그러므로 보는 사람의 호기심을 한껏 부추기는 그런 곳이 아니다. 그의 사진은 통상 아름답다는 고전적인 개념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다. 한편 공론주의, 구호주의나 계몽주의와 같은 목소리와도 결별하고 있다. 그렇다고 앤디 워홀처럼 마릴린 먼로나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후기 산업사회의 표상들도 인화지 위에서 찾을 수 없다. 그의 사진적 자양분은 사이키델릭 예술이나 앨런 카프라나의 상업주의 성향 속에서 그의 감성의 바탕이 생성되었을지도 모르고, 해체나 탈중심, 소멸, 탈신비화, 비연속과 같은 서구적 어법에 경도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어쩌랴 그도 된장국 먹고 김칫국 먹고 성장한 얼굴 노란 한국인인 것을. 그래서인지 그의 사진은 표현에 있어서 햄버거 냄새도 나고 코카콜라 맛도 나지만 그의 사진기는 자연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돋아난 풀잎들과 나무 등걸로 눈이 간다. 아니 깡통 수프나 콜라 캔 속에서 비디오 영상과 컴퓨터의 가상 형상 속에서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희미한 기억을 떠올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사진은 진정성을 형식의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쉽게 잊어버릴 수 없는 우리들의 뿌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정직성은 오늘의 사진 어법으로 고쳐 쓰므로 보는 사람에게 당혹함을 남겨 둔다. 그의 사진에서는 땅도, 풀도, 들도, 나무도 모두 자기의 고유 모습을 버린다. 형태도 색도...
자기 모습을 상실한 자연. 그래서 그 자연은 상처 입은 자연이고 일탈된 자연이며, 분열된 자연이다. 김우영의 자연은 ‘밖으로부터의 자연’이 아니다. ‘안으로 확장된 자연,’ 이미 ‘드러내고자 하는 자연’이 아니라 ‘인식된 자연’이고, ‘반응된 자연’일 수밖에 없다. 칸트는 미를 자연미, 예술미, 정신미로 나눈다. 예술가에게 대상이 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다중적이고, 현실에 근거한 미일 수밖에 없다. 김우영의 사진은 햇빛 아래의 자연을 찍을 수 없는 문명 비평적 시각이 착잡하게 깔려 있다. 착색된 자연, 아마 그가 뉴욕의 거리에서 생각하는 자연은 역시 착색된 자연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또 하나 눈에 띄는 현상은 분열된 이미지들이다. 오늘의 문화적 현실성은 존재의 가변성을 일상 탈출의 전략으로 채택된다. 그것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현장의 멀티미디어의 세계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우리는 하나의 텔레비전 화면에서 다중 채널을 선택할 수 있으며, 컴퓨터 화면도 여러 개로 분할하여 복수의 일을 수행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눈은 하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동시에 보고 느껴야 한다. 랩 뮤직을 들으며 터미네이터를 보고 한 손에는 무선 전화기로 무엇인가 계속하여 지껄여야 하는 세계의 단면 속에 놓여있다.
오늘날 사진가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그 많은 것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초능력의 사진가이다. 김우영의 눈 역시 망원경적 시각과 현미경적 시각이 동시에 겹쳐져 있다. 두 눈이 만나는 접점 지역에서 그의 통일적 관점은 비로소 쉼표를 찍는다. 즉, 현미경적 시각으로 자연을 해체함으로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도 그의 클로즈업 된 눈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그리고 여기저기 조각난 현미경적 이미지들을 다시 잇대어 붙임으로 망원경적 시각으로 자연을 다시 보는 여유를 갖는다. 해체로부터 결함 또는 모음으로의 이행 그 과정에서 인화의 크기를 변형하거나 정합 방식에서 불균형적으로 낯익은 시각의 안정성을 파괴함으로 고정된 프레임의 상식에 저항하고 공간을 확장한다. 마치 앤디 워홀이 액자의 틀을 견주어 냄으로 화면의 끝없는 확장성으로 달려가듯, 그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사진은 밖으로 한없이 달려가는 중간쯤에 잠시 쉬고 있는 듯한 착각을 들게 한다.
세 번째 재미는 혼합 매체의 적극적 도입이다. 일부 사진은 셀룰로이드 테이프를 붙이고 사인펜으로 낙서에 가까운 글씨를 마구 휘갈겨 써 놓았다. 어빙 샌들러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특성을 두 가지로 들고 있는데 하나는 형식주의에의 저항과 두 번째는 소비사회의 비관으로 들고 있다. 김우영의 사진에서 혼합 매체의 사용은 다분히 기존의 사진 문법에 대한 저항의 몸짓으로 보이며, 우리가 매일 쓰는 셀룰로이드 테이프의 거친 사용도 마치 뒤샹의 레이드메이드 아트처럼 사진 자재를 고급문화 하려는 사람들이나 사진의 순수성을 고집하려는 사람에게 탈 장르에 대한 유효한 진술로 보인다. 김우영 사진에 있어서 정직한 현실 재현성이란 그 자체가 시효 상실된 이념일 것이다. 다만 향후 그의 사진의 진로에 있어서 순수하게 사진 그 자체가 문제 될지 아니면 사회학적 방법이나 현상이 그의 사진에 자양분으로 계속적 공급됨으로 보다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향한 또 다른 소통 방법의 출구를 찾을지 그것은 아마도 지켜보아야 할 그에 대한 우리들의 관심 어린 애정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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