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탁 _ 독립 큐레이터/예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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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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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영은 연례행사처럼 미국 대륙을 동서로 횡단한다. 추운 겨울로 언제 폐쇄될지 모르는 로키 산맥의 작은 마을들을 지나기 위해선 세밀한 사전 준비도 필요하다. 몸을 보호할 장비와 산 속에서 일용할 음식, 추운 겨울을 버텨낼 에너지 외에 무엇보다 필요한 건 매년 점점 무거워지는 몸과 스러져가는 마음을 재차 추려야 하는 결심의 순간들이다. 이러한 횡단여행은 제식과 같아서 그것은 김우영이라는 작가의 삶의 무늬를 위해서도 그리고 그것으로 발현될 작품을 위해서도 필요해 보인다. 그가 삶의 리추얼(ritual)로 행하는 이런 여행은 오래된 건물, 아치형의 창문, 근경의 쓰레기통과 교묘히 구성된 벽 사진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그 속엔 작가가 스러져가는 자아를 보듬고 보살핀 시간들이 삭제되거나 은폐되어 있다. 평면 추상화거나 구성적 회화처럼 보이는 사진들 뒤엔 이런 풍경이 숨어 있다.
작가의 작품과 동떨어지고 다소 서사적인 뉘앙스가 스민 풍경이라는 말을 쓴 이유는 작가가 이러한 풍경을 완성하기 위해 매년 같은 장소를 반복해 방문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사진은 필연적으로 시간을 필요로 하고 시간을 구조화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이 서사인데 김우영의 사진에는 그것들이 결락해 있다. 시간과 서사의 은폐 혹은 삭제. 해마다 바뀌는 도시와 거리 풍경, 바스러져 가는 인물들, 동네의 작은 서사들이 제거된다. 연례로 찾아가는 도시와 건물, 사람들을 만나는 긴 시간들이 사진에는 없다.
“리추얼은 나르시시즘적 내면성과 거리가 멀다. 자아 리비도(대상이 아니라 자아를 향한 욕망)는 리추얼과 결합할 수 없다”
-한병철, 『리추얼의 종말』
여행이나 산보의 리추얼은 자아 중심적이기보다 타자를 향한 관계 맺기의 행위다. 여행자나 산책자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몸보다 몸 밖의 타자에 시선을 두게 되는 것이다. 가령 작년에 왔던 그 폐건물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아직 패트릭과 그 가족은 안녕 할까. 옆 집 할머니는 아직 살아계실까 같은 것에서 어제 밤 차문을 긁던 소리 때문인지 뒤숭숭한 꿈자리나 늦게 잔 새벽녘에 갑자기 쌓인 눈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리추얼로 행하는 작가의 순례와 같은 여행의 시간과 사건은 오롯이 작가의 내면에 스밀 뿐 그것이 작품 속에 드러나지 않는다. 작가는 삶의 실재들이 감각적 과잉으로 넘치지 않게 절제한다. 참을 수 없는 건 진부한 일상이나 형식이라 생각해서일까. 자신이 만났던 풍경들을 비가처럼 슬프게 더듬기보다 매끈한 표면의 빛과 색으로 차갑게 구성하는 사진을 보여준다. 영원성을 갈구하듯 삶의 자잘한 인문(人紋)이 화면의 미학 안으로 들어오는 걸 애써 막는다. 그러니 시간 이미지를 가장 잘 담는 사진이라는 매체 속에 그림자가 안 생기는 흐린 날이나 새벽, 저녁의 시간을 기다려 셔터를 누른다. 깊이를 드러낼 그림자도 없고 거리를 지나가는 행인도 안보이고 나뭇가지를 흔드는 중부 사막의 바람도 멈추고 잠시 머물러 쉬어가는 새 한 마리 안 보이는 사진에 작가의 떨리는 손이나 긴장된 호흡 역시 사라지니, 남는 건 오롯이 형태와 구도, 색채뿐이다.
“예술가는 예술의 옷을 입었지만 떨리는 손을 가졌다.”
-단테, 『신곡』, <천국>편에서
보통 회화는 그리고 사진은 찍는다고 말한다. 회화는 대상을 화면 위에 구축하고 사진은 있는 대상을 포획하거나 채집한다. 다분히 사진에 대한 부정적인 이런 정의는 사실 예술의 개념사를 살펴볼 때 정정될 필요가 있다. 무릇 예술/예술가란 삶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감각을 체계화하고 단련하는 사람이다. 사진은 광학이기 이전에 작가의 눈이자 손이다.
뇌와 연결된 떨리는 눈과 손은 삶과 빛의 실체를 찾는 예술 기계다. 미국 유학 시절(89년부터 96년까지) 수많은 밤을 새고 암실에서 이미지를 만들어낼 때, 빛의 신비와 작업의 희열을 좇아 맨해튼의 새벽을 홀로 거닐었을 때, 국내 패션과 광고 사진의 새로운 유형을 만들어 냈을 때, 그의 사진은 자체로 양식을 만들어냈다. 사진이 시작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는 사물에 대한 감각을 한껏 끌어올리고 사진의 끝 지점이랄 수 있는 사진기라는 매체를 자신의 손의 감각 안으로 끌어들였다.
“방 안에 있을 때 세계는 내 이해를 넘어선다. 그러나 걸을 때 세계는 언덕 서너 개와 구름 한 점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월러스 스티븐즈, <사물의 표면에 대하여>
작가의 상처나 여행 중 만났던 일상들은 아치형 창문이나 알록달록한 벽 뒤나 너머 어딘가에 있겠지만 우린 그것을 찾을 수 없다. 삶의 아린 실체는 풍경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풍경을 구성하고 삭제한 형식 속에 있다. 무릇 예술은 세상을 보는 방식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방식에서 나온다는 말과 어울린다. 김우영의 단박한 미국 풍경 속에는 아무도 모르는 풍경이 숨겨져 있다. 삶의 진실이 그러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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