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하르트 바르취 박사_함부르크대학 철학 및 예술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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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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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물소리는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중국 철학자, 장자(莊子, 기원전 369~289년)
무릇 물이란 그 흐르는 자태만 보더라도 내 마음을 실어 보낼만하다. 흐르는 대로 굽고 가로지르며, 때로는 툭 마음을 놓듯, 수직 하강을 즐겨하니 그것이 내 마음 자락과 다르지 않음이다.
김우영, 그의 작품은 물처럼 무심하다. 단조로움이 매혹적이다. 에두르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거울처럼 비춰주는 그 시각적인 효과의 탁월함이 도드라진다. 그의 작품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으나 보지 않고 지나칠 수 있는 대상들을 담고 있다. 때로는 공(空), 부질없다. 도드라진 그래픽의 시각적인 효과는 자연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표면(表面)”을 보여준다. 이는 소우주에서부터 수평선마저 찾을 수 없는 적막한 바다까지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물은 또 다른 형태를 가진다. 그것은 빗방울처럼 작은 물방울이 터지는 그 찰나의 순간, 마치 달의 표면 같기도 하고, 바다 물비늘처럼 보이기도 한다. 둥근 문양은 마치 세월을 겹겹이 두른 나이테, 풍상에 닳고 닳은 돌에 새긴 문양 같기도 하다. 자글자글 주름진, 나이 들어 보이는 피부는 마치 리듬감 있는 아치형의 반복으로 더께더께 앉은 세월의 앉음새, 그 모진 생장(生長)의 과정을 연상케 한다. 그것은 저 사진 속의 작은 대상을 향한 작가의 지긋한 시선. 표면들, 모래로 가득한 가장자리를 지나 저 아득한 고요를 바라보는 듯, 아스라해진다. 그의 사진이 담아낸 담, 물의 표면은 마치 범죄 현장의 증거사진들처럼 적나라하게 보이기도 한다. 레오나르도(Leonardo) 이전에 벽에 새겨진 흠, 벽난로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의 상상력을 지피는 에너지, 물의 흐름 속에서 녹아내리는 영감의 물결이 일고 있다.
그는 자각을 통해서 벽에 새겨진 흔적을 예술적 근원을 들여다보며, 형성의 과정을 표현해냈다. 자신의 창조적인 에너지를 미학적인 구조로 창조하는, 참으로 영리한 천재성이다. 김우영 작품만의 특별한 미학적 효과는 상징성 그 너머에서 조우하는 실존적 물질의 표면이다. 이는 환경적인 조건이 사라진 원초적인 적나라함이다. 이런 날것의 단조로움, 자연현상의 과정을 담음으로써 서양적인 ‘이성적 시각’을 기준으로 한 겉만 번지르르한 표면은 의미가 없다. 외부의 객체로서 자연현상을 결정하는 주체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는 시각으로는 인간과 하나인 자연의 생성과 소멸을 이해할 수 없다.
물아일체(物我一體)…
그것은 바로 자연과 나를 일체화시키는 동양적인 시각으로의 접근. 이는 서양적인 시각과는 격을 달리한다. 음양의 원리를 설명한 도교(道敎, Taoism) 사상은 완(完)과 미완(未完)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과, 서로 반대되는 조건인 세상과 물아(物我)를 세상 모두와 일치하게 한다. 무릇 도(道)란 스스로 생겨나는 것이며, 자연의 섭리. 바로 그 분기점이다. 그것은 물의 움직임이다. 서양에도 자연을 능가하는 완성의 근원에 대해 물음을 던졌던 철학자가 있었는데, 바로 기원전 600년 경의 탈레스(Thales)였다. 그의 물에 대한 해답도 ‘물’이었다. 지구 위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물 위에 떠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를 잇는 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는 같은 물음에 무한한 역동성을 지닌 물을 소우주와 대우주의 원천이라고 대답했다.대양은 노아의 방주, 최초 지구의 범람 후 남은 잔재이며, 인간의 원래 모습은 물고기였다는 것이다.
김우영, 그의 작품 속에서는 많은 대상을 볼 수는 없다. 단지 물의 잔해와 흔적뿐. 그 아득한 세계는 우리 스스로가 찾아야 하는 물음이다.
맺음말
1700년경 청조의 화가 석도(石濤, Shi’tao)는 『고과화상화어록』(苦瓜和尙畵語錄)이란 책에서 내면의 인식을 강구한 다음, 가슴 속에 한 폭의 그림이 그려지고 그런 다음에 다음의 팔이 움직여 붓을 부리고, 붓은 먹을 부려 만물의 형상을 그린다고 하였다. 한편 사람은 내면의 능동적인 인식을 통해서 산과 물을 그리는 과제를 비로소 갖게 된다고도 했다.
“나의 과제는 산과 물이다. 내 과제가 광활하지 않기에 나는 내 과제에 대한 지배력을 사용한다.”
“사람이 산을 과제로 하며, 물을 그 과제로 여기지 않으면 광활한 바다에 빠져나올 길을 찾지 못하고 해안으로 찾아오지 못할 것이며, 해안가는 더 넓은 광활한 바다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 이 이유로 현명한 자는 자신이 도달할 곳이 어디임을 알며, 파도에 밀려 그곳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그 근원에 귀 기울이고, 해안가에 도달했음을 기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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